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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2022년 신춘문예 당선작 문화평론부문] 감정의 연금술과 만짐의 기술(技術/記述) : 김초엽, 천선란, 정세랑의 SF소설을 중심으로 - 전청림

Tomitom 2022. 11. 17.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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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연금술과 만짐의 기술(技術/記述) : 김초엽, 천선란, 정세랑의 SF소설을 중심으로 - 전청림

■ 문학평론1. 감정의 유물론과 ‘만짐’의 망탈리테감정에도 ‘몸’이 있다. 물성이 있고, 두툼하고, 만져진다.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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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연금술과 만짐의 기술(技術/記述) : 김초엽, 천선란, 정세랑의 SF소설을 중심으로 - 전청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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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정의 유물론과 ‘만짐’의 망탈리테

감정에도 ‘몸’이 있다. 물성이 있고, 두툼하고, 만져진다. 만져지기 때문에 만짐이 있고, 만짐이 있기 때문에 만져짐이 있다. 다소 선문답스러운 이 ‘몸’의 정체화가 중요한 이유는, 감정의 물성이라는 ‘몸’의 개념으로부터 능동과 수동의 구분이, 주체와 타자의 구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때 비로소 감정이 나만의 것이라는 자기동일성은 불가능하며, 감정은 자기 자신만의 감정일 수 없다. 감정은 반드시 타인을 통과하며 지연되고, 얽힘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이 뒤엉킴을 전제하는 것이 ‘몸’이다. 몸은 타인을 향한 만짐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나의 만져짐까지도 포함한다. 즉, ‘몸의 있음’으로 인해 나의 살갗은 타인을 만지는 동시에 타자에 의해 만져진다. 만(져)짐의 행위는 이렇게 타자를 향한 열림이 된다.

‘감정의 유물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이러한 감정의 정체화는, 감정이 생물학적인 개인의 본능적인 표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음으로부터 촉발된다는 정동 이론의 통찰이 전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감정은 부대낌이자 만남이고, 힘들의 역학이며, 순간으로만 자신을 노출한다. 감정 연구의 어려움은, 주체 안에 고여있지 않은 이행의 근거를 개념화하고 그 반복과 지난함을 규명하는 것에 있다. 몸과 감정은 언어의 한계에서 끈적끈적한 침처럼 흘러내리고, 사유의 한계를 유발하는 딸꾹질과 같은 것이다.

최근의 과학소설(SF) 작품들이 보여주는 공상과학적 상상력은 ‘확장된 마음’으로서의 몸에 대한 사유와 감정의 부대낌을 묵직한 물질성으로 규명해준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은 감정을 딱딱하게 굳혀서 깨지지 않는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동하는 감정의 형상화될 수 없는 어려움을 만져지는 물질로 사유하게 한다. 공상과학적인 연금술의 상상력을 통해 물질화된 감정은, 싸늘한 쇳내를 풍기는 이성의 ‘타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화된 감정은 이성이라는 용접공에게 기꺼이 몸을 내어주는 수은이다. 감정은 ‘사유하는 몸’¹으로서, 이데올로기와 감정 사이의 매개성을 입증하는 질량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감정이 묵직한 질량이라면, 이 질량은 사라지지 않는 보존의 물질인 동시에 사회라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운동 속에서 늘 새롭게 현상된다.

감정은 손에 잡히는 순간 빠져나가고 기화되는 ‘지금’과 ‘여기’의 실재성이자 사유의 한계점으로 존재한다. 현전도 부재도 아닌, 사유하기 어려운, 찍어 맛볼 수도 없고 붙잡을 수 없기에 일순간 기화되어버리고 마는 마음이라는 존재를 고체로 만드는 감정의 연금술은 SF의 과학적 상상력에서 새롭게 재현된다. 이들이 그려내는 감정의 유물론적 사유는 신자유주의와 과학주의 시대인 현대의 혐오주의 속에서 공포와 불안으로 드러나는 감정의 양태들을 소통과 접촉의 장으로 조심스럽게 옮겨온다. 보이지 않는, 만질 수 없는, 그래서 남들과 같은지 다른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불안한 감정을 나와 사회를 잇는 중심 고리이자 경첩인 ‘물질’로 재사유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감정은 혐오 시대의 불안과 공포의 고독감에서 벗어나 돈독한 공감의 토양이 될 채비를 마친 참이다.

물질화된 감정의 몸을 더듬으며 우리는 타자의 공간인 바깥을 향해 나아간다. 바깥은 주객 비분리의 실상(實狀)을, ‘존재’를 실행시키는 장이다.² 감정의 연금술을 이루는 우리 SF의 상상력은 부대낌이라는 이행 속에서 서로의 살갗을 더듬으며 바깥을 감각하려는 만짐의 ‘기술(技術)’이다. 그러나 동시에 감정의 ‘존재’와 ‘몸’이라는, 의식과 인식 내에 흡수되지 않는 차원을 만지기 위한 노력은 글쓰기라는 상상력의 장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궁극적인 만짐은 ‘기술(記述)’을 통해 가능해진다. 무한한 글쓰기의 장에서 기껏해야 피와 살덩이를 덮을 뿐인 나의 살갗은 유한하고 비좁기만 하다. 그리하여, 소유의 살갗을 공유의 살갗으로 전환하는 만짐의 기술(技術)은 우리 SF의 계보가 그려내는 무한한 상상력의 기술(記述) 속에서 활기를 찾게 된다.

2. ‘물성’이라는 감각적 구체: 김초엽, 「감정의 물성」



2019년 벽두,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길목에서 SF의 힘찬 약진을 알린 김초엽은 「감정의 물성」(『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2019)에서 비물질적인 것의 물질화라는 문제를 깊게 파고든다. 미움과 불안, 잔혹한 혐오로 장악된 ‘퇴행’의 정동 속에서 아름답게 정제된 감정의 결정체(結晶體)를 건져내 보겠다는 신호다. 순도 백퍼센트의 감정적 물질을 걸러내는 이 연금술은 조잡한 신비주의에 의탁되지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과학의 언어, 즉 가장 이성적인 언어를 통해 설득력 있게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품과 오존 냄새가 코를 찌르는 이 연금술에서 살아남는 것은 단연 이성이 아닌 감정이다. 이성을 무기로 한 감정의 장악이 아닌 타자와의 ‘공생가설’을 향한 이성의 노력이 SF의 문학적 알레고리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SF의 마음의 연금술은 감정의 과잉이 현실의 적대로 이어지기 쉬운 작금의 사태에서, 감정마저도 가장 이성적인 언어인 과학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신뢰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감정의 물성」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물성을 획득하고 자신만의 몸덩이를 얻은 ‘감정 덩어리’가 어떻게 곧바로 상품 가치에 예속되고 마는지를 명민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감정체’라고 불리는 물질화된 감정들이 시장에 의해 양산되고, 판매되고, 금지되는 양상은 감정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관리되고, 조절되고, 통제되는 ‘감정 이데올로기’의 측면을 축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일시적·내면적 요소가 아닌 집단적·유동적·사회적 이데올로기로서 감정의 개념을 ‘물질화된 감정’의 상품화와 도구화를 통해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물질화된 감정은 개인이 아닌 집단, 객체가 아닌 공동과 보편의 차원에서 운동하며 ‘공동적 감정체’로 기능한다. 타인과 공유되는 감정은 ‘함께’ 느끼지 않으면 무의미한 공공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감정이 스스로의 육체를 얻는다는 물리적 상상력은 ‘감각하는 신체’를 정제화시켜 ‘감각되는 덩어리’로 산출하며, ‘느끼는 살’을 ‘느끼게 하는 살’로 전환시킨다. 타인의 언어와 표현, 몸짓으로만 감각될 수 있는 무형(無形)의 감정이 기술의 집약이라는 연금술을 통해 ‘감정체’라는 물성으로 몸을 입는다. 이로부터 감정은 인간의 살갗과 촉각이 느낄 수 있는 질감을 얻는다. 가령 뾰족하거나 거친 모양으로, 혹은 특별한 향기가 나는 후각의 차원으로까지 발전한다. ‘감정’이 신체적 질감과 묵직한 질량의 옷을 입음으로써 현전과 부재, 지금과 여기라는 차원에서만 현상화될 수 있었던 감정의 숭고함이 탈신성화와 세속화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물성은 어떻게 사람을 사로잡는가”(218쪽)의 문제에 천착하는 소설의 중심은 육신의 옷을 입은 감정의 세속화, 즉 자본주의화에 관한 질문과도 맞물린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처럼, 아우라가 탈각된 신성은 곧바로 무한 복제의 시장에 직행한다. “이모셔널 솔리드”라는 회사에서 출시된 감정의 물성은 돌멩이처럼 생긴 공포체, 우울체, 증오체 등의 기본적인 형태를 지니며 비누, 향초, 패치 등의 제품으로 파생된다. 감정이 저 자신의 육신을 얻을 때, 인간의 상상력은 그것을 살아있는 끔찍한 괴물의 모습이나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물건으로 형상화하기 마련이다. 「감정의 물성」이 택한 상상력은 후자의 방법이다. 그럼에도 육신을 얻은 감정은 자신의 괴물성을 숨기지 않고 내보인다. ‘나’에게 감정의 물성은 “이상한 상품의 견본품”(191쪽)이자 “도저히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193쪽) 것이다. 고체라는 물성을 얻은 감정이지만, 이성이라는 쇳물에 완전히 용해될 수 없는 감정의 특수성이 수수께끼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감정이 가진 괴물성은 ‘물신’이라는 시장 내의 신화적 기호에 의해 곧바로 전이된다. 감정의 물성을 바라보는 주체의 눈이 소비자의 눈으로 옮겨지며 괴물성을 향한 방어기제가 시장을 매개로 작동하는 것이다. 물성을 얻은 감정이 시장에서 유행하고, “인터넷 커뮤니티와 문화면 기사”(201쪽)를 휩쓸며 시장의 ‘제품’으로 희석되는 모습은 ‘물성’이 ‘물신’의 작용으로 이행되는 과정을 그대로 적시한다. 침착의 비누, 설렘의 초콜릿, 집중 패치의 유행은 “의미가 배제된 감정만을 소비”(214쪽)하는 일로, “손안에 있는, 통제할 수 있는 감정”(204쪽)을 향한 욕망으로 여겨진다. 주체는 자신을 소비자,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호명하는 한에서만 감정의 물성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소비자에게 의미 있는 상품 가치는 사회적 인정으로부터 온다는 점에서 감정체가 내포하는 감정의 의미는 고립된 주관성이 아니라 사회라는 유동성의 장에서 그 가치가 발견된다고 할 수 있다. 시장이야말로 타자의 장이라는 점에서, 감정은 역동적인 사회관계와 집단화된 주관성 내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서사 전반에서 감정의 물성에 부정적인 눈초리를 내비치는 ‘나’는 감정체의 유행에 문제를 제기하는 인물이다. 이때 ‘나’는 감정체의 소비와 유행에 “다들 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204쪽)라는 반응을 보이며 스스로를 사회의 외부로 위치 짓는다. 그는 자신을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로 상정하는 도착적인 주체이다. 그러나 감정은 사회적이고 집단적으로 형성되는 산 경험이기 때문에, 누구도 감정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감정은 실존의 양태로 존재하는 사회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때 ‘나’의 부정적 시선에 대답하는 ‘유진’의 말은 시사적이다.



“선배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제 생각은 이래요. 물성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사람을 사로잡아요. 왜, 보면 콘서트에 다녀온 티켓을 오랫동안 보관해두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사진도 굳이 인화해서 직접 걸어두고, 휴대폰 사진이 아무리 잘 나와도 누군가는 아직 폴라로이드를 찾아요. 전자책 시장이 성장한다고 해도 여전히 종이책이 더 많이 팔리고. 음악은 다들 스트리밍으로 듣지만 음반이나 LP도 꾸준히 사는 사람들이 있죠.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이미지를 향수로 만들어서 파는 그런 가게도 있고요. 근데 막상 사면 아까워서 한 번도 안 뿌려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내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바보 같았는지 유진은 씩 웃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한 거죠.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게 의외로 매력적인 셀링 포인트거든요.”(205∼206쪽)



유진의 말은 물성을 획득한 감정이 시장에서 여러 가지 “라인별로 다른 가격”(206쪽)으로까지 분화되며 물신화되는 작용을 적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가 하는 그 이상의 중요한 이야기는 감정이 사회적 집단 내에서 수용되고 형성되며 공유되는 속성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이 콘서트 티켓이나 종이책을 소비하듯 감정체들은 “향과 질감, 권장 사용시간, 맛, 모양”(206쪽)에 따라 수용되고 사용자들은 이에 반응한다. ‘나’는 이것을 “퍼포먼스나 예술” “플라시보”(206쪽)일 뿐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바로 그것이야말로 감정이 집단 속에서 사회관계의 재현으로 나타나는 양식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소설의 후반부에 감정의 물성은 마약성 물질로 판명됨에 따라 식약처로부터 전면 수거됨과 동시에 판매가 금지되고, 실질적인 효능이 시시한 수준으로 확인된다. 실질적 효능이 없는 감정체들에 대한 반응이 플라시보에 불과하다는 ‘나’의 의심은 들어맞지만, 역설적으로 그 시시한 증명 속에서 감정의 흐름은 집단 환각과 퍼포먼스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감정체의 소비가 이루어지는 장(場)은 반드시 타자를 경유한 시장이어야 한다. 바로 이 면을 자세히 밝히는 것이 이 소설의 결말과 함께 중요한데, 타자의 공간인 시장을 경유한 감정체야말로 단순히 내면화되고 사적인 것이 아닌 공동체와 집단 사이에서 공유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감정체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감정체는 혁신적인 ‘신제품’이기 때문에 주목받지만, 이것이 감정의 육체라는 괴물성을 감추고 각광받는 이유는 그것이 시장이라는 속물적 집합 속에서 ‘함께’의 의미로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내가 느끼는 우울이 너의 우울과 같다, 내가 느끼는 기쁨이 너의 기쁨과 같다는 공통감이 시장이라는 타자의 장을 매개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공통감은 교환가치의 세상이라는 불안하고 유동적인 시장을 매개로 하기에 속물의 타인지향적 감정이다. 그 공통감은 진정성이 결여된 속물의 공감이자 허구의 공감이다. 그러므로 시장 내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체의 소비는 “의미가 배제된 감정”(214쪽),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눈물 그 자체”(215쪽)인 허울뿐이다. 의미와 내용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기쁨도, 공포도, 슬픔도, 외로움도 등가로 교환된다. 순도 높은 감정의 물성이 그야말로 ‘순수상태의 속물성’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소비가 항상 기쁨에 대한 가치를 지불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감정을 향유하는 가치를 지불하기도 해요. 이를테면, 한 편의 영화가 당신에게 늘 즐거움만을 주던가요? 공포, 외로움, 슬픔, 고독, 괴로움…… 그런 것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죠. 그러니까 이건 어차피 우리가 늘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까?”(214쪽)



시장이 발휘하는 힘은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속성인 감정을 물신화된 상품이라는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위력으로 환원하는 것에 있다. “나는 감정에 통제받는 존재일까? 아니면 지배하는 존재일까? 나는 허공중에 존재하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해”(217쪽)라는 보현의 말처럼, 우리는 “허공중에 존재”하기 때문에 공감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감정의 물성이 물신이 된 이 소설의 공간에서 공감은 시장이라는 극악한 욕망의 장소를 매개로 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감정체라는 감정의 물성을 손에 쥐고도 스스로가 감정을 통제받는지 혹은 지배하는지를 인지할 수 없는 ‘불안’을 주체에게 자아내게 된다. 불안은 교환가치에 불과한 상품과 집단적인 자기기만의 세계라는 시장을 매개로 한 공감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시장의 유동과 흐름을 그대로 떠안는 불안정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보현이 불안정한 상품에 불과한 우울체에 그토록 매달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공동체 의식의 부재에서 비롯된 고립감을 사회적 마음인 시장으로부터 위안받으려는 절실함과 고독이 그 대책 없는 소비 속에 깃들어 있다. ‘멍청한’ 소비라며 면박을 주고 차라리 정신과 상담을 권유하는 ‘나’의 조언은 보현의 소비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시장을 매개로 한 감정을 손에 넣는 일은, 어느 정도의 상호주관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짧고도 강한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위안은 가짜이므로 그녀에게는 수십 개의 우울체와 병원에서 받아온 항우울제가 동시에 필요하다. 우울체가 가져오는 속물적 공감과 타인지향성의 불안은 항우울제가 주는 내면의 안정으로 잠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3. ‘매개’로서의 몸의 난제: 천선란, 「어떤 물질의 사랑」



피부 아래의, 살갗 아래의 공간에서 신체의 리듬으로 존재하던 감정이 저 자신의 육신을 얻을 때 그 신묘함은 곧바로 시장의 논리에 의해 환원될 수밖에 없음을 「감정의 물성」에서 확인했다. 교환가치의 세계 속에서 ‘물신’으로서의 여행을 멈추고 다시 ‘물성’의 세계로 돌아온 감정은 다시 인간의 육체에 발을 붙인다. 이로부터 시장에서의 여행을 멈추고 신체에 정박한 감정의 육신은 이전처럼 ‘살덩이’ 속으로 침잠하는 것이 아닌 ‘살갗’이라는 경계로 기능하는 변화를 겪는다. ‘살’이 주체의 내부로 다시 향하는 것이라면, ‘살갗’이란 ‘내 몸’이라는 고유성이 사라지는 자리로 스스로 제공되고 노출되는 사건이다.³ 바깥으로 노출되는 살갗과 지상으로부터 무한한 해부학적 도축을 자아내는 몸이야말로 끝나지도 요약되지도 않을 가능성을 가져오는 개방의 몸짓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 배꼽도 성별도 없는 ‘어떤 물질’로 존재하며 무한한 해부를 요청하는 살갗이 있다. 이때 해석의 다카포, 즉 영원한 도돌이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배꼽’이라는 기원이 아니라 ‘살갗’이라는 매개이다.

천선란의 「어떤 물질의 사랑」(『어떤 물질의 사랑』, 아작, 2020)에서는 배꼽이 없고 생식기도 없이 알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등장한다. 기원이 유별나다는 것이 몸의 첫 번째 난제라면, 사랑에 빠질 때마다 성별이 바뀌는 것이 두 번째 난제에 해당한다. ‘나’의 몸의 난제는 라온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라온은 “상대방과 같아지려는 습성 때문에 계속 모습을 바꾸고”, “영원히 약속하고 싶은 상대를 만나면 딱 한 번 알을 토해”(148쪽)내는 지구 밖 외계인이다. 엄마에게 양육 받으며 살고 있지만, ‘나’를 탄생시킨 것은 라온이기 때문에 그는 엄마인 동시에 아빠가 될 수 있는 몸의 난제를 안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엄마와 라온은 ‘나’를 탄생시킨 후 우주선의 문제로 헤어졌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 지구를 다시 찾은 라온은 ‘나’를 남겨두고 엄마와 함께 지구를 떠나게 된다.

이 소설을 지배하는 주제는 육체의 인간적 기원을 잃은 ‘나’가 “무엇도 되고 무엇도 되지 못하고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121쪽) 되는 몸의 난제로부터 시작하여 “모두가 다 서로에게 외계인”(143쪽)이라는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에 있다. 부정적 박탈에 대한 긍정적 박탈, 즉 박탈에 대한 박탈을 보여주는 주제 의식이 이 소설을 지탱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소설은 정상적인 몸의 기원과 형상이 비정상적 몸에 대한 부정적인 박탈로 기능하는 상황을 되비추고, 이를 다시 ‘모든 인간은 비정상적이다’라는 명제를 통해 모든 정상적인 기원을 긍정적으로 박탈시키고 있다. “‘원래 그런’건 없어. 당연한 것도 없고”(96쪽)라는 엄마의 말로부터 ‘나’는 어쨌든 “이 세상에 있다”(111쪽)는 것의 진실을 긍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진실을 뒷받침해주는 이는 라오이다. 머문 자리에 에메랄드빛의 비늘조각이 떨어지는 라오의 몸은 성별로는 특정지을 수 없는 비현실적인 ‘나’의 몸이 가진 기이함을 용해하며, “지구에는 다른 기준”(131쪽)이 필요하다는 ‘나’의 문제의식을 심화시킨다.

“눈도, 코도, 귀도 다 다르잖아요. 손가락 크기도 다르고 머리카락이 나는 방향도, 심어진 눈썹의 개수도 다르잖아요”(139쪽)라는 라오의 말로부터 ‘나’는 기원이 강제하는 “틀린 것”(152쪽)과 “원래 그런”(147쪽) 것의 편견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문제적인 것은 가슬가슬한 소설의 난제가 전혀 풀리지 않았고, 오히려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서사의 후반부 “너는 너야. 끝까지 무엇이라고 굳이 규정하지 않아도 돼”(153쪽)라는 엄마의 말은 얼핏 답을 내려주는 것 같지만, 서사 중반 ‘나’가 제기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는 도돌이표의 기능을 한다.



나는 내 몸의 난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어떤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은 무엇이라도 다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지금은 굳이 나를 무엇으로든 규명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무엇도 되고 무엇도 되지 못하고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된다.(121쪽)



앞서 우리는 ‘나’의 몸의 난제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지구인에게 해당되는 문제라고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위의 인용문은 모든 지구인을 외계인으로 만들고, 그들의 몸을 모두 극도로 심각한 난제로 심화시키는 가장 악랄한 난이도의 문제은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몸의 난제’가 중요한 이유는, ‘매개’이자 ‘살갗’으로서의 몸이 가지는 기능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규정하지 않아도 되는 몸은 순전한 살덩이일 뿐이다. 그러나 타인과 만나는 장 속에서 살덩이의 표면이 되는 살갗은 언제나 끝없는 해석을 요청하는, 혀와 문자의 해부로 도출되는 몸이다. 살갗은 각질이 되어 늘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락하는 자신이며, 또 새롭게 돋아나는 표피이다. 타자에게 가 닿음으로써 만지고, 역으로 또 만짐당하는 경계의 장이 바로 살갗이라는 물듦의 몸이다. 그럼으로써 살갗은 끝나지 않는 존재 기원의 운동으로, 제 기원을 ‘다시’ 시작하여 노래하는 ‘다카포’의 무한한 변용을 가능하게 한다.⁴ 살갗은 경계-되기의 몸이자 접촉을 일으키는 사건의 장인 셈이다.

난제를 가진 살갗은 그 자체로 어려운 몸이다. 소설은 이 어려움을 “어떤 물질”(153쪽)이라는 몸이 지닌 ‘온도’와 ‘빛깔’로 녹여내며 난제를 긍정적으로 전유한다. ‘나’에게 지구인과 다른 몸이 부정적 박탈로 기능한다면, ‘나’의 몸은 차라리 무한한 해석의 난제 그 자체로 남는 것이 더욱 긍정적일 수 있다. 그리고 이 무한한 해석의 다카포는 타자와의 만남을 고통이 아닌 긍정으로 전환시킨다. ‘나’의 살갗의 반짝임이 타인과의 사랑 안에서 비로소 긍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살갗은 ‘밖-갗으로의 노출’⁵이라는 점에서 나로부터의 절삭을 가능하게 하는 표피이며, 바깥을 향해 존재하는 나를 감각하게 하는 출발점이다.



민혁이는 내가 좀 특이해서 좋다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물으니, 자기도 정확한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를 보고 있으면 뭔가 특이하다고 했다. 그리고 가끔 내 몸에서 수영장 물빛이 반사되어 빛난다고 했다.(103쪽)

라현아, 그거 아니? 너는 가끔 빛이 반사하는 것처럼 몸이 반짝거린다? 그게 무척 예뻐, 가만 보고 있으면 너는 진짜 빛나.(110쪽)



민혁과 풀잎, 선배라는 세 인물과 사랑을 나누는 ‘나’는 자신의 몸이 긍정되는 과정을 몸의 빛을 통해 전해 듣는다. “수영장 물빛”처럼 반짝거리는 몸은 ‘나’의 살갗에 대한 긍정이자 무한한 해석을 요청하는 다카포의 기원이 된다. 이 반짝임은 선배와의 만남에서 실질적인 “탐구”(119쪽)의 대상이 된다. 서로의 몸을 자세히 관찰하고 탐구하는 관계 속에서 선배는 “세상은 다양하구나. 존재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게 세상인데, 앞으로 보이지도 않고 형태도 없는 미래 걱정은 좀 덜해야겠어”(119쪽)라는 말로 그 감탄을 대신한다. ‘나’의 몸의 반짝임은 빛의 스펙트럼처럼 다양함의 대상이자 끝없는 변용의 매개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변용을 이루어내는 사랑의 ‘온도’이다.



이 사랑은 어떤 물질로 이루어진 사랑일까. 나를 꽉 끌어안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이 미적지근한 온도의 사랑은. 엄마가 내게 마지막으로 알려준 것은 온도였다. 이 온도를 기억하고 있다가, 이런 온도의 존재를 만나야 한다고.(153쪽)



살갗은 해석의 다카포이자 해부와 탐구의 장이지만, 약간의 누름으로도 생채기를 입는 과민한 피부 끝의 몸이다. ‘온도’로부터 우리는 다시 살갗이라는 몸의 감정으로 되돌아온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탐구와 해부 그 이전에, 살갗에 적절한 온도이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적정 온도는 해부가 이루어지는 타자성의 장에서 나의 살갗도 남의 살갗도 보호할 수 있는 만짐의 기술을 요한다. 이 온도는 메스의 차가움도, 용광로의 뜨거움도 아닌 편안한 미적지근함이다. 이 사랑의 온도는 아주 오래된 메타포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온도, 이성과 감정 사이의 온도, 나와 타자 사이의 온도인 경계의 온도이자 뒤섞임의 온도이다. 차게 식은 시체의 온도도 열병에 걸린 환자의 온도도 아닌, 살갗에 안전한 온도인 삼십육점오도의 항상성. 이로써 피와 살이 표피 아래에 흐르는 ‘살색’의 독특성은 온도에 반응하는 리트머스지처럼 다채로운 빛깔로 나타난다.

4. ‘열림’을 위해 만(져)지는 살갗: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



빛깔, 온도, 해석의 다카포는 몸과 감정이 가진 매개성을 해명해주기는 하지만, 여전히 난제를 해명하지 못한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미봉책에 불과하다. 그것이 내부에 품고 있는 괴물성을 조심스럽게 덮어두고 해석의 무한한 변용이라는 포장지만을 사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개 아래의 몸은 자족의 포만감으로 넘쳐나며, 해석의 무한한 변용은 서로가 서로에게 외계인이라는 상대주의의 반복으로 금세 변질될 우려가 있다. 신진 SF 작가들의 부상과 약진에도 불구하고 정세랑이 가지는 단단한 힘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그녀는 인간이 가지는 감정-몸의 괴물성을 직접적으로 마주하며 매개의 미봉책에 불과했던 몸을 ‘통로’와 ‘열림’의 입구로 사유한다. 이로부터 몸은 매개에서 ‘건넴’의 자리로 들어선다.

「목소리를 드릴게요」(『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문제가 되는 몸은 ‘괴물’이라고 불리는 ‘보균자’들이다. 소설의 초점인물인 여승균은 목소리만으로 16명의 살인자를 발생시킨 영어 교사이며, 마취제를 맞고 수용소에 감금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수용소에는 머리카락을 흘리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전염시키는 머리카락 선동가 정하민, 스스로 발병하지 않지만 온갖 바이러스와 세균을 타인에게 옮기는 김경모, 시체를 파먹는 구울(ghoul) 이수현이 감금되어 있다. 이들을 관리하는 간수들은 일목인(一目人)으로, 한 가지만 집요하게 파고드는 ‘괴물’ 중 하나이지만 원하는 요소 하나만 충족해주면 뭐든 가리지 않는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국가에서 공무원으로 선출된다.

승균과 같은 ‘괴물’들은 “괴물끼리 항체”(164쪽)가 있기 때문에 서로가 옮지 않지만, 이들 사이에도 종류가 있다. 수용소를 “나갈 수 있는 괴물과 영원히 나갈 수 없는 괴물”(212쪽)이 나뉘기 때문이다. 승균과 하민은 ‘성대 제거술’과 ‘전신 체모 레이저술’을 받으면 수용소를 나갈 수 있지만, 슈퍼 보균자인 경모와 구울인 수현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이 구분과 관계없이 괴물들은 수용소를 제집처럼 편안히 여긴다. 이들은 자기 자신의 괴물성을 잠재우지 못해 “자발적으로 갇힌 사람”(163쪽)이며, “수용되어 있는 게 아니라 보호받고 있는”(167쪽) 형국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닥칠 성대 제거술에 대비해 노래방 기계로 실컷 노래를 부르던 승균 역시 “나가지 말아버릴까?”(171쪽)라는 말로 수용소에서의 삶의 만족도를 표시한다. 건조하고, 소박한 수용소의 삶은 안락한 자궁처럼 편안하다. 밥을 먹고 나면 “좋은 나라야……”(159쪽)라고 중얼거릴 만큼 균형 잡힌 메뉴가 나오고, 원하는 물품을 살 수 있으며, 나라의 세금으로 자유와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수용소의 만족도는 수용소 내의 사람들에 대한 ‘헌신’과 ‘애착’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소속감과 일체감, 정서적 애착으로부터 등장하는 가짜 만족이다.⁶ ‘괴물’들이 모인 고향에서는 그들이 ‘괴물 아닌 것’과 마주하며 받은 상처가 용해되지만, 그 기쁨은 자족의 우물이자 고립의 함정이다. 수용소에서 인기 있는 “한 방향으로만 소통의 올드미디어”와 “세기가 바뀌지 않은 것 같은”(175쪽) 분위기는 수용소가 가진 이와 같은 단절성을 반영한다. 괴물들은 “무자비한 동반자”로서의 나 자신의 괴물 같은 심연⁷을 인정하는 괴물, 즉 ‘괴물을 인정하는 괴물’이기 때문에 수용소의 단절된 삶을 저 자신의 집처럼 환영한다. 그러나 수용소의 삶에 대한 헌신은 “자유를 대가로 지불”(176쪽)하는 호사라는 점에서 퇴소를 거부하는 ‘길들여진 괴물’의 삶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 가짜의 만족을 깨트려주는 소설의 계기는 바로 신연선이라는 새로운 입소자이다. 그녀는 주변인을 중독자로 만든 혐의로 수용소에 갇히지만, 수용소 내에서의 삶을 거부하며 비명을 지르거나 격렬하게 항의하는 등 다른 수감자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란 얼마나 징그러운 적응의 생물이던가. 나갈 길이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수용소에 적응하고부터 연선은 달라진다. 그녀는 수현의 머리를 땋아주고, 하민의 게임을 정복하고, 승균의 노래방 기계를 점령하는 등 이들의 “하루하루를 새롭게 만들며”(186쪽) 수용소의 “황금기”(188쪽)를 이끄는 인물이다. 소설의 갈등은 연선이 폐렴, 세균성 피부염, A형 간염, 말라리아 등에 거듭 감염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병들이 슈퍼 보균자인 경모로부터 감염이 되는 것이라면, 연선은 괴물끼리의 항체가 없다고 볼 수 있는 일반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장을 비롯한 수용소의 관리자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회피하며 연선을 위한 대응에 늑장을 피운다. 이로부터 그녀는 수용소와 괴물의 존재에 물음을 던지는 존재가 된다.



경모와 소장의 대화를 계단참에서 엿듣던 승균은 예전과 달리 괴물이라는 단어에 흠칫하지 않았다. 민감한 단어였는데 익숙해졌는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금까진 아무도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그들은 괴물이었다. 자조적인 뉘앙스로 말하는 괴물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괴물들 간의 면역으로 증명되는 괴물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 괴물이 아닌 연선이 던져졌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큰 착오가……?(191쪽)



여기에서 “민간인을 사찰”(192쪽)하는 나라의 폭력이라거나 괴물을 판별하는 국가 수용소의 모호한 기준이라거나 하는 권력 문제의 비판은 접어두자. 정세랑의 SF적 상상력은 괴물을 말 그대로 “자조적인 뉘앙스로 말하는 괴물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괴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괴물은 괴물이다. 그러나 이 괴물이 어떤 괴물인지 알아야 한다. 특이한 신체를 가진 괴물, 신체의 괴물성 탓에 감금된 괴물이 바로 수용소의 괴물들이다. 동시에 이들은 “시스템에 등록된 시민”(167쪽)이기도 하다. 몸의 불가해성을 가진 이들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괴물이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사람이 가지는 괴물성을 현시하기 위해 감금된 십자군이자 선발자이기도 하다. 즉, 수용소의 괴물들은 인간이 가지는 몸의 괴물성이 “공동체를 위해 희생”(168쪽)될 때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그리고 그 희생에 대해 어떻게 스스로가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문학적 알레고리로 기능하는 것이다. 나의 나 자신에 대한 불가해성은 큰타자의 불가해성과 결정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수용소의 괴물들이 가지는 몸의 불가해성, 즉 그들의 괴물성은 우리 모두에 대한 괴물성과 연결되어 있다.

승균은 연선의 등장으로부터 “자신이 폭력성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이상적인 시민인데도 갇혀 있다는 게 갑자기 믿을 수 없어”(192쪽)진다. 괴물이 괴물이기를 자처하고 스스로를 감금하는 것만으로는 이 사회의 괴물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누구나, 평범하게 괴물이다. 연선을 수용소 바깥으로 내보내는 한바탕의 소동이 벌어진 후, 수용소가 이들을 대하는 “교묘한 폭력”(209쪽)이야말로 그 기초적인 악마성을 짐작케 한다. 승균을 비롯한 수감자들은 지하에 감금되고, ‘여 선생’이라고 불리던 승균에 대한 호칭은 ‘저 새끼’로, 수감자들이 누리던 노래방과 당구대, 게임 등의 문화 향유물은 압수된다. ‘길들여진 괴물’이 ‘저항하는 괴물’이 되는 순간 인간의 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무서운 사물성은 권력관계와 폭력성의 게임의 세계 속으로 빠져든다. 한때 ‘길들여진 괴물’이었던, 그러나 연선의 탈출을 도우며 ‘저항하는 괴물’이 되어버린 승균의 선택이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나갈 수 있는 괴물’이라는 선택권을 쥔 자로서 그가 택하는 결말이 괴물성을 지닌 인간이 통과해야 할 미래를 형상화하기 때문이다.



연선을 만나러 갈 것이다. 찾아가면 그 알 수 없는 얼굴로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겠지. 수술대는 추웠고, 의사는 어쩌면 의사가 아니라 정부가 보낸 사람이라 수술을 하는 척 승균을 죽일 수도 있겠지만, 승균은 미소 지었다. 마취약이 들어올 때, 의사가 숫자를 거꾸로 세라고 했는데 승균은 전혀 엉뚱한 말을 남겼다.

하필이면 사랑이 일목 대상인 일목인처럼.

물거품이 될 각오가 선 인어처럼.

“목소리를 드릴게요.”(215쪽)

승균에게 목소리는 체계적인 교육자의 육성으로, 노래방의 유희로, 세상을 향한 무기와 “협박의 도구”(202쪽)가 되었다가, 마침내 ‘제거’된다. 그것은 “양심의 가책”이자 “피부의 도드라진 부분”(207쪽)으로, 타인과의 부대낌에서 전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무엇이기 때문이다.

국가적 폭력의 장(場)인 수용소를 나가기 위해 무고한 시민이 자신의 목소리를 제거하다니, 결말이 허무맹랑하고 폭력적이라고? 그렇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자신의 몸을 포기하고 타자의 장으로 내처 나간다는 한 주체의 선택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힘든 일인지를 정세랑이 강조하는 부분이다. “목소리를 드립니다”라는 승균의 외침은, 물거품이 될 것을 각오한 인어의 결심과도 같으며, “아버지, 이것은 진정 나의 몸이니, 내 영혼을 정녕 당신에게 바칩니다”라는 예수의 절규와도 같지 않은가.

타자의 장에 들어선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몸 전체를 잃을 각오를 예비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고통의 지점에는 단지 벌어지고 잘리고 해부되고 파괴되고 분산된 ‘주체’가 있을 뿐이다.⁸ 괴물성을 지닌 몸에는 뜨겁고 타들어가는 무자비한 칼날이 꽂혀지고, 굳은살의 단단함은 잘게 잘려지고 썰리며, 피부 사이로 갈라진 틈은 문이 된다. 단단한 자기동일성이 순수 접촉의 장이 되기 위해, 몸이 열려있는 일종의 ‘봉투’가 되기 위해, 매끈하고 팽팽한 살에 타인이 허용될 주름이 지기 위해, 내가 내 몸을 영원히 모르기 위해 나는 내 몸을 당신에게 바친다. 그럼으로써 몸은 낯선 것이, 타인의 무단 침입을 허용하는, 타인에게 남용의 권리를 허락하는 것이 된다.

몸의 열림으로부터 만(져)짐을 긍정하는 정세랑의 박피는 ‘붕괴와 불일치와 분열’을 긍정하는 그녀의 글쓰기의 특징에서 비롯된다. “읽는 행위에서 발생하는 빛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실존하는 사람들과 실존하지 않는 사람들이 교류하는 그 경험에 빛이 아닌 다른 이름을 붙이기는 어렵다”⁹라고 말하는 정세랑의 작가정신은 만짐의 기술(技術)은 몸의 쓰기라는 기술(記述)을 통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다는 이 시대 SF의 망탈리테를 견인하는 듯하다. 그 적절한 빛이야말로 몸들의 열림을 가시화하는 여명의 빛이며, 하나의 몸이 빛을 기록하는 공간이 되는 만짐의 빛이라고 볼 수 있다.



5. 혐오 팬데믹과 언택트 시대의 통과의례



김초엽, 천선란, 정세랑 작가가 보여주는 만짐의 망탈리테는 ‘왜 지금 여기, 우리에게 SF가 당도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증명이자 공식이다. SF의 부상이 인공지능(AI)의 시대, 과학기술의 시대인 21세기만의 문학적 현상이라는 발상만으로는 부족하다. 혐오 정동이 팽배하고 감정의 퇴행이 만연한 현시대의 ‘감정 이데올로기’의 측면을 함께 고려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와 맞물린 사회적 거리두기는 ‘마음의 거리두기’라는 차원과도 맞물려 혐오 정동과 감정의 퇴행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슈퍼 보균자가 수용소에 감금된 상황처럼, 강제 추행이 만짐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 만짐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극도로 절제되고 차단된다.

만짐의 망탈리테는 언택트 시대에서의 마음의 접촉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마땅한지를 보여준다. 이들 소설에서의 만짐은 신체의 직접적인 만짐이 아니라 유물화된 마음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김초엽의 감정의 물성, 천선란의 어떤 물질, 정세랑의 목소리는 이런 점에서 만지지 않고도 만져질 수 있는 감정-몸의 차원으로 만짐의 차원을 확장한다. 이 세심한 접촉은 문학이라는 읽기와 쓰기의 차원에서의 교류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그 힘을 얻지 못한다. 이로써 우리의 몸에 아로새겨진 ‘감정이 있는 심연’은, 바깥을 가장 멀리 보기 위해 가장 가까운 현미경을 동원하는 SF의 감수성으로부터 ‘감정이 있는 실험’의 장으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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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장 뤽 낭시, 『코르푸스』, 김예령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 113쪽.

² 박준상, 『떨림과 열림』, 자음과 모음, 2015, 10쪽.

³ 김예령, 「몸과 접촉의 사유: 낭시는 썬다」, 『자음과 모음』 2017년 겨울호, 199쪽.

⁴김예령, 앞의 글, 202쪽 참조.

⁵ 장 뤽 낭시, 앞의 책, 36쪽.

⁶ 어빙 고프먼, 『수용소』, 심보선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8, 207쪽 참조.

⁷ 슬라보예 지젝, 「이웃들과 그 밖의 괴물들」, 케네스 레이너드 외, 『이웃』, 정혁현 옮김, 도서출판b, 2010, 229쪽.

⁸ 장 뤽 낭시, 앞의 책, 81쪽.


⁹ 정세랑, 「붕괴와 불일치와 분열로 바깥을 본다」, 『아뇨, 문학은 그런 것입니다: 문학동네 100호 특별부록』, 문학동네, 2019, 377쪽.

 

 

<당선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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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좋다. 생활의 냄새가 좋다. 따뜻하다. 정겹고 상냥하다가도 금세 덧나고 그리워지는 이 세계가 좋다. 사랑하고, 나름으로 죽고, 장식(粧飾)하고, 아쉬워하는 그 가운데 우리가 있었노라고 선언하는 문학이 좋다. 문장의 맛이 좋다. 누구를 부르는 소리, 망설이는 발자국, 비가 올 때의 촉감. 읽어도 읽어도 도무지 만만치 않아서 좋다. 무작정 선하지 않아 더 좋다.

묘하다. 흑과 백이 겉도는 무채색의 활자로부터 예술적인 세계구상이 펼쳐지고, 누군가의 진정 어린 온기가 살포시 다가온다는 것. 문학이 주는 온기가 있어 아침과 저녁, 환할 때도 어두울 때도 늘 설렐 수 있었다. 짧게 기뻐하고, 다시 문학으로 설레고 싶다.

김미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아낌이 없게 풍부하고 값진 가르침을 주셨다. 어려운 시기에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어서 기쁘다. 이곳, 문학이라는 회색지대의 깊이를 알려주신 서영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늘 열정적으로 가르침을 주시는 이화의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미국에서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시는 신기욱 선생님, 글 짓는 법을 알려주신 강영숙 선생님께도 감사하다. 더 잘 쓰기 위해 몸부림치겠다는 다짐을 보태며, 심사위원 김형중 선생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내 자리를 존중해주신 집안 어른들께 인사드린다. 묵묵히 믿고 기다려주셔서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마음 따뜻하게 격려해주는 신호등 친구들이 있어 우정의 의미를 깨닫는다. 의지가 되는 대학원 선후배들에게도 고맙다. 마지막으로, 찬림과 세은에게 사랑의 인사를 전한다. 단단한 마음의 구석을 만들어가는 매일이 기쁘고 고맙다.

△전청림. 1992년 서울 출생. 전공은 국어국문학. 이화여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다.

 

<문화평론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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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투고작은 총 18편이었다. 편수는 작년에 비해 줄어든 셈이다. 그러나 심사가 쉬웠다고 말하기는 힘들 듯하다. 한두 편을 제외하고는 정독이 필요할 만큼의 밀도를 갖춘 투고작들이었기 때문이다. 투고작들 중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작가론이었다. 그 중 ‘역사와 예술의식-정지돈론’ ‘단 하나의 희지를 위한 되풀이-누적 없는 반복에 의한 시적 거리두기’(황인찬론), ‘앓음에서 을픔으로, 존재에 말 걸기-김경후의 시 세계’가 눈에 띄었다. 세 글 모두 대상 작가(시인)의 문학 세계에 관해 정밀하고 심도 깊은 분석을 보여주었다. 다만 공히 아쉬웠던 것은 이른바 ‘맥락 속에서 읽기’의 미덕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한 작가(시인)의 문학 세계를 분석하는 데 골몰한 나머지 그들이 현재 한국의 문학장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 문제성, 가능성 등에 대한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 데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달까? 신인들에게 그런 넓은 시야를 바라는 것 자체가 과도한 요구일 수도 있겠으나 그런 기대에 부응하는 투고작도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회고록, 가정법-2020년대 새로운 소설 비평에 부치는 서설’이 그런 글이다. 200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 문학장의 비평 담론들을 비판적으로 조망한 뒤, 야심차게도 ‘2020년대 새로운 소설 비평’의 초석을 놓아 보겠다는 포부가 활달했다. 그러나 결국 그 포부가 글 전체를 두루 관통하는 데 성공한 글은 아니었다. 정공법을 피해, 혹은 마땅한 정공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듯 외국 문학의 사례로 우회하다가 평이한 제안으로 끝나는 결말은 좀 밋밋했달까? ‘감정의 연금술과 만짐의 기술(技術/記述)-김초엽, 천선란, 정세랑의 SF소설을 중심으로’가 유달리 돋보였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 무릇 좋은 비평의 초입에는 ‘시야의 확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한국의 문학장 어디쯤을 어떤 방식으로 초점화할 것인가를 판독해내는 능력 말이다. 한 신인 평론가가 최근 한국의 문학장에서 ‘김초엽, 천선란, 정세랑’을 소환해서는, ‘감정의 물질성, 살갗, 만짐, 장 뤽 낭시’ 등의 범주와 레퍼런스를 비평적 도구로 삼아, ‘SF적 윤리’에 대한 고찰을 설득력 있게 수행했다면, 그는 이미 정확하고 넓은 시야를 확보한 평론가임에 틀림없다. 세심한 작품 해석에 설득당했다는 말도 첨언한다.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김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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