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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시 8

후회 없는 삶 이제부터라는 것을 마음 편안히 갖게 하소서

입동의 시 임강빈 땀 흘린 만큼 거두게 하소서 손에 쥐게 하소서 들판엔 노적가리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주먹을 펴게 하소서 찬바람이 지나갑니다 뒤돌아보는 지혜를 주소서 살아 있다는 여유를 가르쳐주소서 떨리는 마음에 불을 지펴주소서 남은 해는 짧습니다 후회없는 삶 이제부터라는 것을 마음 편안히 갖게 하소서 나의 겨울은 항상 이 시로 시작해. 후회 없는 삶, 이제부터라는 것을. 마음 편안히 갖게 하소서.

사랑에 빠져서 정말 좋았던 건 세상 모든 순간들이 무언가 되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

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가기 김선우 자전거 바퀴 돈다 바퀴 돌고 돌며 숨결 되고 있다 풀 되고 있다 너의 배꼽에서 흐르는 FM 되고 있다 실개천 되고 있다 버들구름 되고 있다 막 태어난 햇살 업고 자장가 불러주는 바람 되고 있다 초록빛 콩꼬투리 조약돌 되고 있다 바퀴 돌고 돌며 너에게 가는 길이다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무언가 되고 있는 중인 아침 부스러기 시간에서도 향기로운 밀전병 냄새가 난다 밀싹 냄새 함께 난다 기운차게 자전거 바퀴 돌린다 사랑이 아니면 이런 순간 없으리 안녕 지금 이 순간 너 잘 존재하길 바래 그다음 순간의 너도 잘 존재하길 바래 자전거 바퀴 돌리는 달리아꽃 빨강 꽃잎 흔들며 인사한다 다음 생에 코끼리 될 꿀벌 자기 몸속에서 말랑한 귀 두짝을 꺼낸다 방아깨비들의..

어느 날 네가 또 슬피 울 때, 네가 기억하기를 네가 나의 자랑이란 걸

나의 자랑 이랑 김승일 넌 기억의 천재니까 기억할 수도 있겠지. 네가 그때 왜 울었는지. 콧물을 책상 위에 뚝뚝 흘리며, 막 태어난 것처럼 너는 울잖아. 분노에 떨면서 겁에 질려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네가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는 날이면, 세상은 자주 이상하고 아름다운 사투리 같고. 그래서 우리는 자주 웃는데. 그날 너는 우는 것을 선택하였지. 네가 사귀던 애는 문밖으로 나가버리고. 나는 방 안을 서성거리면 내가 네 남편이었으면 하고 바랐지. 뒤에서 안아도 놀라지 않게, 내 두 팔이 너를 안심시키지 못할 것을 다 알면서도 벽에는 네가 그린 그림들이 붙어 있고 바구니엔 네가 만든 천가방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좁은 방 안에서, 네가 만든 노래들을 속으로 불러보면서. 세상에..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이면 얼마든 달콤해질 수 있다

슈톨렌 안희연 "건강을 조심하라기에 몸에 좋다는 건 다 찾아 먹였는데 밖에 나가서 그렇게 죽어 올 줄 어떻게 알았겠니" 너는 빵을 먹으며 죽음을 이야기한다 입가에 잔뜩 설탕을 묻히고 맛있다는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하며 사실은 압정 같은 기억, 찔리면 찔끔 피가 나는 그러나 아픈 기억이라고 해서 아프게만 말할 필요는 없다 퍼즐 한조각만큼의 무게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퍼즐 조각을 수천수만개 가졌더라도 얼마든지 겨울을 사랑할 수 있다 너는 장갑도 없이 뛰쳐나가 신이 나서 눈사람을 만든다 손이 벌겋게 얼고 사람의 형상이 완성된 뒤에야 깨닫는다 네 그리움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보고 싶었다고 말하려다가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돌아오는 마음이 있다 아니야 나는 기다림을 사랑해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마침내 네가 이르게 될 모든 끝의 시작을!

20년 후에 지에게 최승자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것 같지 눈만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이윽고 너는 새로운 눈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일, 봐라 저 많은 세월의 개떼들이 나를 향해 몰려 오잖니..

물에 젖는 건 싫어하지만 햇볕이 남아 있는 단어들은 아껴먹으려고 남겨 둔 사탕 같은 것

사탕과 해변의 맛 서윤후 해변에 버려진 것 중엔 내가 가장 쓸모 있었다 버려진 사람들이 잃은 것을 대신해 다시 버려진 사람을 줍는 세계에서 우리의 수도는 어느 쪽이었을까 한 뼘의 파라솔이 그늘을 짓고 우리는 통째로 두고 간 유실물로 남겨져 하나의 관광지를 이룬다 파도의 디저트가 되네 하나밖에 모르는 맛으로 사탕처럼 둥글게 앉아 녹아 가는 연인들 철썩이는 파도가 핥아 가네 발가락부터 녹으며 조금씩 둘레를 잃어 가는 사랑이여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던 연인들이 전투적으로 질투하고 비로소 세계는 달콤해지고 온화해지네 해변이라는 말을 좋아해 물에 젖는 건 싫어하지만 햇볕이 남아 있는 단어들은 아껴먹으려고 남겨 둔 사탕 같은 것 내가 먹어본 사탕 중엔 네가 제일 별로였어 너처럼이라는 직유가 가진 설탕과 소금 사이의..

그러므로 이제 이 눈과 코와 입과 귀를 막아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시길

꽃잎, 꽃잎, 꽃잎 이장욱 무섭다 결국 그곳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섭다 마음이 무섭고 몸이 무섭고 싹 트고 잎 피고 언제나 저절로 흐드러지다가 바람 불어 지는 내 마음 속 꽃잎 꽃잎, 그대가 무섭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하나의 고요한 세상을 지니고 있으니, 무섭다 그러나 나는 나를 이끄는 매혹에 최선을 다해 복종하였으므로 내 고요한 세상에 피고 지는 아름다운 모반을 주시하였다 그대가 처연히 휘날려 내 몸과 마음이 어지러울 때 단 한번도 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흘러가는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기억을 만나면 기억을 죽이고 불안을 만나면 불안을 죽이고, 그러므로 이제 이 눈과 코와 입과 귀를 막아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시길 그대에게 익숙한 세상..

맨손이면 부드러워질 수 있을까

한 사람이 있는 정오 안미옥 어항 속 물고기에게도 숨을 곳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낡은 소파가 필요하다 길고 긴 골목 끝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작고 빛나는 흰 돌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지나가려 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진짜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복이 우리를 자라게 할 수 있을까 진심을 들킬까봐 겁을 내면서 겁을 내는 것이 진심일까 걱정하면서 구름은 구부러지고 나무는 흘러간다 구하지 않아서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구할 수도 없고 원할 수도 없었다 맨손이면 부드러워질 수 있을까 나는 더 어두워졌다 어리석은 촛대와 어리석은 고독 너와 동일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오래 기도했지만 나는 영영 나의 마음일 수밖에 없겠지 찌르는 것 휘어감기는 것 자기 뼈를 깎는 사람의 얼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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